금 가격이 온스당 5,000달러를 넘어섰고 은 가격도 100달러 선을 돌파했다. 원자재 시장의 급등으로 치부하기엔 숫자가 지나치다. 이는 인플레이션 헤지 차원의 투자가 아니라, 기존 금융 시스템 전반에 대한 집단적 불신임 투표에 가깝다. 시장은 지금 돈을 벌기보다, 돈을 지키려 하고 있다.
월가에서는 벌써 “2026년 투자 플레이북은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통화·금융 질서를 지탱하던 전제들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금과 은의 급등은 그 결과이자 경고다.
‘화폐 가치 훼손’에 베팅하는 시장, 그러나 그 끝은 안전한가
월스트리트는 이 현상을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Debasement Trade)’라 부른다. 통화 가치가 훼손될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실물 자산으로 도피하는 거래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베팅이 아니다. 시장 곳곳에서 사재기(Hoarding) 현상이 관측되고 있다. 이는 신뢰의 붕괴 국면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징후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발언은 이를 노골적으로 확인시킨다. 그는 “달러에 대한 글로벌 뱅크런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유럽연합(EU)에 금과 미 국채를 대체할 수 있는 공동 안전자산 발행을 주문했다. 달러 중심 체제의 수호자를 자처해온 국제기구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심상치 않다.
금본위제로 회귀하지는 않겠지만, 시장은 이미 “달러 하나로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금값 5,000달러는 출발점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아시아의 불안정, 일본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아시아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일본 국채 10년물 금리는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고, 소비자물가는 2%대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일본은행이 대응할 여력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막대한 국가 부채와 만성적인 무역 적자가 엔화 약세와 인플레이션을 동시에 자극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 국채 시장의 불안이 미국 국채로 번지기 전에 미국이 일본을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일본 문제는 더 이상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대만 위기 시 일본이 도망치면 미·일 동맹은 붕괴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이미 선택을 끝냈고, 산업과 군사 공급망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국을 향한 트럼프의 청구서, 우산은 공짜가 아니다
한국의 처지는 더 복잡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무역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관세 25% 재부과를 위협하고 있다. 동시에 방위비 분담 확대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이는 협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안보 우산은 조건부이며, 기여하지 않는 동맹에 대한 관용은 없다는 것이다.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미국은 비용을 외부로 전가하려 할 것이고, 한국은 그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중립은 허용되지 않는다, 선택을 강요받는 서방
유럽, 영국, 캐나다도 예외가 아니다. NATO 수장은 “미국 없이 유럽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고 인정했지만, 미국은 에너지와 통상 압박으로 유럽을 다루고 있다. 영국은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말하지만, 미국은 그런 중립을 용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캐나다 역시 북미 관세 블록 편입 압박을 받고 있다.
세계는 다시 블록화되고 있고, 애매한 입장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내부에서부터 흔들리는 제국
문제는 미국 내부다. 생활비와 의료비 부담은 급증했고, 중산층의 균열은 명확해지고 있다. 명품 시장 침체는 소비 여력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헤지펀드 거물 레이 달리오가 “내전 가능성이 더 분명해지고 있다”고 경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값 5,000달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이는 시장이 기존 질서의 지속 가능성에 던지는 냉정한 질문이다. 지금의 세계는 새로운 규칙을 찾고 있고, 그 과정은 결코 부드럽지 않을 것이다. 금은 그 불안의 온도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