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여의도, 판교에서 만나는 창업자들의 표정이 예전 같지 않다. 단지 불황을 우려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돈의 길이 막혔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시리즈 B, C 라운드를 준비하던 스타트업들은 펀딩 일정을 미루고 있다. 어떤 회사는 직전 밸류에이션보다 30~40% 낮은 가격을 받아들여야 할 처지다. 또 다른 회사는 매각을 검토한다. 한 창업자는 식사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투자자들이 우리 회사를 못 믿는 게 아닙니다. 그들도 돈이 안 들어옵니다. LP가 출자를 못 하니 GP도 새 투자를 못 하는 겁니다.”
VC 쪽 사정도 다르지 않다. 한 GP는 “1년 전 클로징할 줄 알았던 펀드가 아직 절반도 못 채웠다”고 했다. 회수는 막혔다. 분배는 줄었다. 후속 펀드 모집은 지연됐다. 포트폴리오 회사가 IPO나 M&A로 빠져나오지 못하니 LP에게 돌려줄 돈이 없다. LP는 다시 출자하지 않는다. 자본의 톱니바퀴가 멈춘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만의 문제로 보였다. 고금리, IPO 시장 침체, 부동산 PF 후유증, 내수 위축. 그러나 글로벌 데이터를 보면 결론은 다르다. 이것은 한국의 경기 문제가 아니다. VC라는 자본조달 모델 자체가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 미국을 만든 엔진, VC
VC는 단순한 투자업이 아니다. 지난 반세기 미국 기술 패권을 만든 자본시장 인프라다.
오늘날 세계 10대 기업 상당수는 초기 VC 자금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아마존, 애플, 알파벳,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테슬라가 그렇다. 지난 50년간 미국에서 상장된 기업의 절반 가까이가 VC 백드 기업이었고, 이들이 미국 상장사 시가총액과 연구개발 투자의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다.
실리콘밸리는 낭만적 창업 신화만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자본시장 설계의 산물이었다. 1974년 미국은 ERISA(Employee Retirement Income Security Act), 즉 근로자퇴직소득보장법을 제정했다. 이후 연기금이 VC 같은 위험자산에 출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제도 하나가 자본의 물길을 바꿨고, 그 물길 위에서 미국의 기술 패권이 자랐다.
미국이 강한 이유는 기업가가 많아서만이 아니다. 모험자본이 흘러가는 길을 국가가 먼저 깔았기 때문이다.
그 엔진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
■ VC의 순환 고리가 끊겼다
VC의 원리는 복잡하지 않다. LP가 펀드에 출자한다. GP가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회사가 성장한다. IPO나 M&A로 회수한다. 분배금이 LP에게 돌아간다. LP는 다시 다음 펀드에 출자한다. 이 순환이 반복되며 다음 세대 스타트업에 자금이 공급된다.
문제는 이 순환이 멈췄다는 점이다.
1990년대 미국 VC 투자 기업이 상장하기까지 걸린 평균 기간은 7~8년 수준이었다. 지금은 12년에 가까워졌다. 시드에서 시리즈 D까지 가는 시간도 길어졌다. 기업은 더 오래 비상장으로 남는다. 그만큼 투자금은 더 오래 묶인다.
분배도 막혔다. 5~10년 차 펀드는 과거 출자금의 상당 부분을 매년 분배했지만, 최근에는 그 비율이 크게 떨어졌다. 투자자가 기대했던 회수는 늦어지고, 장부상 가치는 남아 있으나 실제 현금은 돌아오지 않는다.
전 세계 비상장 유니콘은 1900개를 넘는다. 이들의 합산 기업가치는 수조 달러에 달한다. VC 펀드 장부에 묶인 미실현 가치만 약 3조 달러로 추정된다. 이 돈이 풀리지 않으면 다음 세대 스타트업으로 자본이 흐르지 않는다.
유니콘은 더 이상 빨리 상장하는 회사가 아니다. 오랫동안 비상장으로 머무는 거대한 사모기업이 됐다. 스페이스X, 스트라이프, 오픈AI가 대표적이다. 자본은 이미 공모시장을 우회하고 있다. 그러나 사모시장의 인프라는 여전히 서류, 동의서, 법률 검토, 폐쇄적 네트워크에 머물러 있다.
시장은 커졌지만 길은 좁아졌다. 돈은 많지만 흐르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 사모시장의 본질이다.
■ 세컨더리는 커졌지만 시장은 좁다
엑시트가 막히자 시장은 대안을 찾았다. 세컨더리 거래다.
VC 세컨더리 시장은 빠르게 커졌다. 일부 연도에는 VC 백드 IPO 규모에 육박할 정도다. 대형 운용사들은 컨티뉴에이션 펀드를 만들어 우량 자산을 계속 보유하거나 다른 투자자에게 넘긴다. 겉으로 보면 시장이 스스로 해법을 찾은 듯하다.
그러나 속은 다르다.
거래는 극도로 편중돼 있다. 오픈AI, 스페이스X, 스트라이프, 앤스로픽, 데이터브릭스 같은 극소수 슈퍼유니콘에만 돈이 몰린다. 상위 20개 기업이 세컨더리 거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 수백, 수천 개 비상장기업은 사실상 거래되지 않는다. 팔고 싶어도 살 사람이 없다. 사고 싶어도 믿을 정보가 없다. 가격 발견도 어렵다.
한국은 더 심각하다. 비상장 주식 세컨더리는 일부 PEF와 전문 운용사 중심의 폐쇄 시장에 가깝다. 유니콘이나 예비 유니콘의 초기 투자자, 임직원, 엔젤투자자가 지분을 유동화할 표준화된 길은 사실상 없다. 회사가 잘 크고 있어도 주식을 팔 수 없다. 성장과 유동성이 분리된 시장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사모시장 거래의 마찰이 너무 크다. 정보 비대칭, 표준 부재, 양도 제한, 높은 거래비용, 제한된 접근성. 이 다섯 가지가 사모시장을 묶고 있다.
이 문제는 경기 회복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금리가 내려가도 사모시장의 구조적 병목은 남는다. 인프라를 바꿔야 한다.
■ 토큰화가 푸는 다섯 개의 매듭
토큰화는 단순히 주식을 블록체인 위에 올리는 기술이 아니다. 사모시장 인프라를 다시 까는 일이다.
첫째, 정보 비대칭을 줄인다. 토큰화된 지분은 발행 시점부터 자본구조, 우선주 조건, 청산우선권, 베스팅, 락업, 마지막 거래 가격 등을 검증 가능한 형태로 기록할 수 있다. 매수자와 매도자가 같은 정보를 보고 가격을 논의하는 시장이 가능해진다.
둘째, 거래 표준을 만든다. 지금 사모 거래는 매번 계약서를 새로 쓰고, 법률 검토를 다시 하고, 다자 동의를 받아야 한다. 토큰화된 증권은 거래·결제·청산을 코드와 표준 위에 올릴 수 있다. ERC-3643, ERC-1400 같은 보안토큰 표준은 이미 존재한다.
셋째, 양도 제한을 자동화한다. 우선매수권, 락업, 화이트리스트, 적격투자자 검증, KYC 조건을 스마트컨트랙트에 내장할 수 있다. 과거 수개월 걸리던 확인 절차가 훨씬 짧아진다.
넷째, 거래비용을 낮춘다. 토큰과 결제자산이 같은 레일 위에 있으면 동시 결제, 즉 DvP가 가능하다. 에스크로, 청산소, 반복 법률 검토 비용이 줄어든다. 비용이 낮아져야 슈퍼유니콘이 아닌 중간 규모 기업도 거래될 수 있다.
다섯째, 접근성이 넓어진다. 토큰화는 단위 분할과 24시간 글로벌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 한국 기관, 싱가포르 패밀리오피스, 두바이 국부펀드, 미국 적격투자자가 같은 자산을 같은 규칙 아래 거래할 수 있다.
토큰화는 편리한 인터페이스가 아니다. 사모시장이라는 막힌 도로에 새 레일을 까는 일이다.

■ ICO의 실패는 끝이 아니었다
토큰화의 역사는 실패에서 시작됐다.
2017년 ICO는 백서 한 장으로 글로벌 자금을 모을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기, 미등록 증권, 무책임한 발행이 시장을 망쳤다. 미국 SEC는 다수 ICO를 미등록 증권 발행으로 봤고, 한국은 ICO를 전면 금지했다. ICO는 규제를 우회한 자본조달이었다. 그래서 실패했다.
이후 Reverse ICO가 등장했다. 카카오의 클레이튼, 텔레그램의 TON, 킥의 Kin처럼 실체 있는 기업이 토큰을 발행하려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계가 분명했다. 토큰이 어떤 권리를 대표하는지, 어디서 거래돼야 하는지, 어떤 법적 보호를 받는지 불명확했다.
그 다음 단계가 STO였다. 규제 밖이 아니라 규제 안에서 증권형 토큰을 발행하는 모델이다. 배당, 의결권, 청산우선권 등 권리를 법적으로 명확히 하고, 적격투자자 검증과 공시 의무를 따른다.
최근에는 RWA, 즉 실물자산 토큰화로 진화했다. 미국 국채, 사모대출, 부동산, 원자재, 탄소배출권, 음악 저작권까지 토큰화 대상이 넓어졌다. 블랙록과 프랭클린템플턴 같은 글로벌 금융회사도 이 시장에 들어왔다.
ICO에서 RWA까지의 흐름은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토큰화가 무법지대의 실험에서 제도권 인프라로 들어온 과정이다. 8년 전 방향은 맞았다. 다만 도구, 규제, 시장이 준비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는 다르다. 표준은 성숙했고, 규제는 정비되고 있으며, 기관 자본은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이제 하나다. 누가 표준을 잡느냐.
■ 한국은 늦었다. 그러나 끝난 것은 아니다
한국은 STO 제도 도입을 일찍 논의했지만 실행은 늦었다. 자본시장법과 전자증권법 개정은 오래 표류했고, 그 사이 글로벌 시장은 앞서갔다.
미국은 GENIUS Act를 통해 결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연방 규제 틀을 만들었다. 2025년 7월 18일 백악관은 이 법이 미국을 디지털자산의 글로벌 리더로 만들기 위한 입법이라고 설명했다. CLARITY Act는 디지털자산 시장 구조와 SEC·CFTC 관할 구분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하원을 통과했다. 싱가포르는 Project Guardian을 통해 토큰화 실증을 진행했고, 두바이는 디지털자산 전용 규제 체계를 구축했다. 일본도 증권형 토큰 발행 사례를 쌓고 있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STO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아니, 느렸다.
하지만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다. 원화는 글로벌 디지털자산 거래에서 중요한 통화다. 업비트와 빗썸은 세계적인 거래소다. 국내 디지털자산 이용자는 1000만 명을 넘는다. 한국은 이미 디지털자산 사용자 기반과 거래 인프라를 가진 나라다.
또 하나의 변수는 중국이다. 중국은 암호화폐 거래를 금지하며 민간 디지털자산 경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홍콩이 일부 역할을 하고 있지만 본토 중국이 빠진 자리는 크다. 아시아에서 디지털자산 강국이 될 후보는 많지 않다. 한국은 그중 가장 현실적인 후보다.
여기에 K-콘텐츠라는 자산이 있다. 음악 저작권, 영상 IP, 팬덤 기반 수익권, 게임 IP는 글로벌 투자자가 이해하는 한국형 실물자산이다. 뮤직카우가 K팝 저작권을 RWA 형태로 미국 시장에서 추진하는 흐름은 상징적이다. 한국이 강한 자산을 글로벌 자본과 직접 연결하는 모델이다.
이 모델은 콘텐츠에만 머물 이유가 없다. 한국 비상장기업 지분, VC 펀드 LP 지분, 부동산 PF 채권, 인프라 수익권으로 확장될 수 있다.
문제는 역시 속도다.
■ TIPS의 교훈을 토큰화에 적용하라
한국은 이미 좋은 제도 설계 경험을 갖고 있다. TIPS다.
TIPS는 정부가 직접 스타트업을 고르는 방식이 아니었다. 민간 투자사가 먼저 투자하면 정부가 매칭하는 구조였다. 시장의 판단에 공적 자금이 레버리지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중요한 마중물이 됐다.
토큰화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정부가 직접 자산을 고르고 프로젝트를 설계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 방식은 느리고, 보수적이며, 실패 책임만 키운다.
민간 발행사와 금융회사가 먼저 토큰화 프로젝트를 검증하게 해야 한다. 정부는 그 위에 규제 샌드박스, 세제 혜택, 글로벌 진출 지원, 결제 인프라를 제공하면 된다. 발행은 민간이 주도하고, 국가는 신뢰와 규칙의 레일을 깔아야 한다.
한국형 토큰화 TIPS가 필요하다. STO, RWA, 비상장 지분 토큰화 프로젝트를 민간이 발굴하고, 정부가 검증된 프로젝트에 제도적 지원을 붙이는 방식이다. 그래야 속도가 난다. 그래야 시장이 움직인다.
■ 빠진 마지막 퍼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다
토큰화된 자산은 결제자산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한국 자산을 토큰화해도 결제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뤄진다면, 결제 주권은 미국으로 넘어간다.
지금 한국에서 토큰화 자산을 사고팔려면 결국 은행 계좌와 원화 결제망을 거쳐야 한다. 이 구조로는 24시간 글로벌 거래가 어렵다. 해외 투자자 접근도 불편하다. 자산과 결제수단이 다른 레일에 있으면 스마트컨트랙트 기반 동시 결제도 어렵다. 결국 다시 에스크로, 청산, 법무 절차가 끼어든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큰화된 한국 비상장기업 지분과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같은 블록체인 위에 존재할 때, 한국 사모시장은 글로벌 유동성 풀과 연결된다. 싱가포르, 두바이, 미국의 투자자가 한국 스타트업 지분을 24시간 원화 기반으로 거래할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편의 기능이 아니다. 토큰화 시대의 결제 주권이다. 이것을 놓치면 한국 자산은 토큰화되더라도 달러 결제망의 하청 시장이 될 수 있다.
■ 미국은 두 번째 ERISA를 쓰고 있다
미국은 다시 움직이고 있다.
50년 전 미국은 ERISA로 연기금 자본을 VC로 흘려보냈다. 그 결과 실리콘밸리가 탄생했고, 미국의 기술 패권이 만들어졌다. 지금 미국은 같은 방식으로 디지털자산 시장의 제도적 레일을 깔고 있다.
GENIUS Act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결제 인프라로 끌어들이는 법이다. CLARITY Act는 디지털자산 시장의 관할과 구조를 정리하려는 법이다. 여기에 전략적 비트코인 준비자산을 연방 법률로 굳히려는 ARMA, 즉 American Reserve Modernization Act 논의까지 더해지고 있다. ARMA는 미국 전략 비트코인 준비자산을 영구적인 연방법 체계로 codify하려는 법안으로 소개되고 있다.

미국은 디지털자산을 더 이상 변방의 투기 상품으로 보지 않는다. 국가 자본시장 인프라로 보고 있다. 1970년대에는 연기금의 물길을 바꿨고, 2020년대에는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자산의 물길을 바꾸려 한다.
이것이 패권국의 방식이다. 먼저 제도를 만들고, 그 위에 시장을 올린다. 시장이 커지면 표준이 되고, 표준이 되면 다른 나라는 따라오게 된다.
한국이 머뭇거리는 사이 글로벌 표준은 미국 중심으로 굳어진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미루고, STO를 제한적으로만 열고, 비상장 자산 토큰화를 샌드박스 안에만 가둬두면 한국은 발행국이 아니라 이용국이 된다. 레일을 까는 나라가 아니라 레일 사용료를 내는 나라가 된다.
자본시장 인프라를 빌려 쓰는 나라는 패권국이 될 수 없다.
■ 디지털 G2의 자리는 비어 있다
글로벌 디지털자산 패권 구도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미국은 디지털자산을 자본시장 인프라로 끌어안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펀드, 비트코인 준비자산, 디지털자산 시장 구조 법제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글로벌 결제 인프라의 일부가 됐다.
중국은 민간 암호화폐를 금지했다. 유럽은 MiCA로 규제 체계를 만들었지만 자본시장이 단편화돼 있다. 싱가포르와 두바이는 빠르지만 자체 기초자산 풀이 작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미국 다음의 디지털자산 축은 어디가 될 것인가.
한국은 후보가 될 수 있다. 거래 인프라가 있다. 이용자가 있다. 콘텐츠 자산이 있다. STO 제도 논의가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도 시작됐다. TIPS라는 민관 매칭형 제도 설계 경험도 있다.
퍼즐은 흩어져 있지만 조각은 이미 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전략으로 묶느냐다. STO, RWA, 원화 스테이블코인, K-콘텐츠 IP, 비상장기업 유동화, VC 세컨더리 시장을 따로 볼 일이 아니다.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한국은 토큰화 시대의 사모시장 표준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남이 만든 표준 위에서 거래 수수료나 내는 시장이 될 것인가.
■ 벽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강남과 여의도, 판교로 돌아가 보자. 창업자와 GP들의 어두운 표정은 일시적 불황의 표정이 아니다. 자본 재순환 모델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VC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VC 인프라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기업은 오래 비상장으로 남고, 회수는 지연되고, LP의 돈은 묶이고, 다음 세대 창업자는 자금을 얻기 어려워졌다. 사모시장은 커졌지만 유동성은 줄었다. 자본은 쌓였지만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자본은 죽은 자본이다.
토큰화는 이 문제의 유일한 답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인프라적 해법임은 분명하다. 정보, 권리, 거래, 결제, 접근성을 하나의 디지털 레일 위에 올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50년 전 ERISA로 VC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제 GENIUS, CLARITY, ARMA로 디지털자산 시대의 두 번째 제도 변혁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도 이에 상응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레일을 만들고, 토큰증권 발행과 유통시장을 열고, K-콘텐츠와 비상장기업 자산을 글로벌 자본과 연결해야 한다.
토큰화는 기술 정책이 아니다. 금융 정책이고, 산업 정책이며, 국가 전략이다.
한국이 디지털 G2를 말하려면 거래소 순위나 이용자 수만 자랑해서는 안 된다. 원화 결제 레일, 토큰증권 발행 제도, 글로벌 유통시장, 사모자산 유동화 인프라를 한꺼번에 설계해야 한다.
미국은 이미 두 번째 ERISA를 쓰고 있다. 한국은 아직 서문도 쓰지 못했다.
늦지 않았다. 지금 결단한다면, 한국은 토큰화 시대의 규칙을 따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만드는 나라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