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비롯한 첨단산업의 투자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지주회사의 자회사 지분 규제를 완화하기로 하면서,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가 한층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SK하이닉스 같은 대형 반도체 기업은 이번 조치로 외부 자본을 유치해 설비나 인프라 투자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현재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국내 자회사(지주사의 증손회사)의 지분을 100% 소유해야 하지만, 정부는 이를 50% 이상만 보유하면 사업이 가능하도록 규제를 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와 함께 민간 및 정책 자금을 유치할 수 있도록 장기 임대 방안을 도입하고, 지주회사가 제한적으로 금융리스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설비 투자에 막대한 초기 비용이 필요한 반도체 산업 특성상, 이 같은 조치는 자금 조달 구조를 유연하게 만들어 투자 시점이나 규모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경기와 고객사 수요에 따라 등락을 반복하는 사이클 산업으로, 투자 타이밍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에는 막대한 자금을 단기간에 조달하는 데 한계가 있어 최적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SK하이닉스 곽노정 대표는 “장비를 먼저 세팅하는데도 3년이 걸리면 시간이 부족해진다”고 말할 정도로 사전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제도 개선으로 SK하이닉스는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어 외부에서 자금을 유치하고, 지은 설비를 임대 형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투자 구조를 갖출 수 있게 된다.
투자 확대는 단순한 공장 증설에 그치지 않고, 연구개발과 인재 육성, 소재 및 부품분야까지 아우르게 된다. 이는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걸친 확장을 의미한다. 실제로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금은 당초 120조 원에서 600조 원으로 크게 늘어난 상태이며, 이는 AI 수요 증가 등 인프라 고도화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과거에 30조 원이면 가능했던 팹(반도체 공장) 건설이 이제는 150조 원이 필요할 정도로 비용이 늘어나고 있어 외부 자본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이번 정책은 반도체에 국한되지 않고 배터리, 전기차, 에너지 등 다른 전략산업으로도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금융 계열사를 거느린 현대차그룹은 금산분리 원칙 때문에 지주사 전환에 제약이 있었지만, 관련 규제가 풀리면 보다 유연한 경영 체계를 갖출 수 있다. 이차전지 업계, 에너지업계 역시 외부 투자를 위한 합작회사(JV) 설립 등 다양한 자금 조달 방안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다만, 규제 완화로 외부 투자자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경기 침체 시 투자 회수 압력이나 배당 요구가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공정거래위원회의 심사와 승인이 필수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실제 제도 시행까지는 시간과 불확실성의 변수가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행정 절차가 투자 의사결정을 지연시킬 수 있다며, 제도 목적에 맞는 실질적 효율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향후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산업 전반에 활로를 마련해줄 수 있으며,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투자 속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정책의 실질적인 이행과 민간 자본의 참여가 어떤 시너지를 낼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