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이 블록체인 기술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시기였다면, 2024년부터 2025년은 그 가능성이 '실체'가 되어 금융 시장을 강타한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그 중심에는 바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 있다.
2026년 1월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2,000억 달러(약 280조 원)를 넘어섰다. 이는 단순한 암호화폐 시장의 유동성을 넘어, 국경 없는 결제와 송금, 그리고 가치 저장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페이팔(PayPal), 비자(Visa), 소니(Sony), 로빈후드(Robinhood), 그리고 유럽의 핀테크 거인 레볼루트(Revolut)까지,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진입 러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묘한 현상이 발견된다. 이를 우리는 '스테이블코인의 딜레마(The Stablecoin Dilemma)'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역설적인 현실: "제 이름을 걸겠습니다. 하지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페이팔은 전 세계 4억 3천만 명의 활성 사용자를 보유한 핀테크의 제왕이다. 자금력, 기술력, 규제 대응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역량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페이팔은 자사의 스테이블코인 'PYUSD'를 발행하기 위해 블록체인 인프라 기업 팍소스(Paxos)와 손을 잡았다.
소니(Sony)의 사례는 더욱 극적이다. 소니는 소니 그룹의 IP와 연동되는 자체 이더리움 레이어2 블록체인 '소니움(Soneium)'을 직접 개발했다. 블록체인 메인넷을 만들 기술력이 있는 회사가, 정작 그 위에서 돌아갈 스테이블코인은 바스티온(Bastion)이라는 스타트업에게 외주를 맡겼다.
유럽 최대의 BNPL(선구매 후지불) 기업 클라르나(Klarna)와 미국의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Stripe)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체적인 발행 시스템을 구축하는 대신, 브리지(Bridge)와 같은 인프라 기업을 선택했다.
왜일까? 겉보기에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매우 간단한 공식처럼 보인다.
"은행 계좌에 1달러를 예치하고, 블록체인 상에서 1토큰을 발행한다. 그리고 언제든 1:1로 바꿔준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문장 뒤에는 기업들이 절대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운영의 늪'이 도사리고 있다.
딜레마의 원인: 이것은 소프트웨어 사업이 아니라 '규제 제조' 사업이다
기업들이 직접 발행(Build)을 기피하는 이유는 스테이블코인 비즈니스의 본질이 기술이 아닌 '규제와 금융 운영'에 있기 때문이다.
1. 규제 인프라의 악몽 (Regulatory Hell) 미국에서 합법적인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발행하려면, 기업은 50개 주(State) 각각에서 송금업 라이선스(MTL, Money Transmitter Licenses)를 취득하거나, 뉴욕금융감독청(NYDFS)과 같은 강력한 규제 당국으로부터 신탁 인가(Trust Charter)를 받아야 한다. MTL을 50개 주에서 모두 취득하는 데만 평균 2년의 시간과 수백만 달러의 법률 비용이 소요된다. 또한 최근 논의되는 연방 차원의 스테이블코인 법안(Payment Stablecoin Act 등)은 은행 수준에 준하는 자본 건전성과 월간 제3자 회계 감사를 요구한다.
2. 24/7/365 유동성 관리의 압박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문제다. 기존 금융 시스템(은행)은 주말과 공휴일에 쉬고, 오후 4시면 문을 닫는다. 반면 블록체인은 1년 365일, 24시간 단 1초도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만약 일요일 새벽 3시에 거액의 환매(Redemption) 요청이 들어온다면? 직접 발행사는 이를 처리하기 위해 은행 업무 시간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실시간 유동성 파이프라인과 트레저리(Treasury) 팀을 운영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테크 기업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업무다.
3. 컴플라이언스 리스크 (AML/KYC) 스테이블코인은 익명성이 보장된 블록체인 위를 오간다. 하지만 발행사는 자금세탁방지(AML)와 고객확인(KYC), 그리고 해외자산통제국(OFAC)의 제재 리스트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테러 자금이나 마약 거래에 자사 코인이 연루될 경우, 기업의 본업 전체가 규제 당국의 철퇴를 맞을 수 있다.
결론: 딜레마의 본질은 '선택과 집중'
결국 스테이블코인의 딜레마는 "모두가 스테이블코인을 원하지만, 아무도 스테이블코인 회사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페이팔과 소니는 냉정한 계산을 마쳤다. 그들은 결제 회사이고 엔터테인먼트 회사이지, 신탁 은행이 아니다. 규제 준수와 인프라 관리라는 골치 아픈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그 위에서 돌아가는 서비스와 고객 경험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기업들은 이 딜레마 앞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다음 2편에서는 기업들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전략 경로들을 심층 분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