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 통화정책위원들이 중동전쟁에 따른 물가 불안을 이유로 6월부터 기준금리를 올릴 가능성을 잇따라 내비치면서, 유로존 통화정책이 다시 긴축 쪽으로 기울고 있다.
13일(현지시간)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요아힘 나겔 총재는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금리 인상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물가 흐름이 유럽중앙은행(ECB)이 상정한 부정적 시나리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기본 시나리오 자체에도 이미 두 차례 금리 인상이 반영돼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통화긴축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인사로 분류되는 나겔 총재는 단기 기대인플레이션도 ECB 목표에서 멀어졌다고 평가했다. 기대인플레이션은 앞으로 물가가 얼마나 오를지를 경제 주체들이 예상하는 수준을 뜻하는데, 이 수치가 높아지면 실제 가격과 임금 인상 압력도 커질 수 있다.
ECB 내부의 경계감은 다른 핵심 인사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ECB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이자벨 슈나벨 집행이사는 최근 연설에서 에너지 가격 충격이 경제 전반으로 번질 경우 이른바 2차 파급 효과를 막기 위해 긴축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차 파급 효과는 원유·가스 같은 에너지 가격 상승이 운송비, 식료품, 서비스 요금, 임금 인상 요구로 차례로 확산하는 현상을 말한다. 중동전쟁이 에너지 공급 불안을 자극하면서, ECB가 단순한 일시 물가 상승이 아니라 보다 오래가는 인플레이션으로 번질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시장에서는 ECB가 6월 11일 통화정책회의를 시작으로 올해 말까지 두세 차례 정책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배경에는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유로존의 부담스러운 경제 여건이 있다. 유로존의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3.0% 올랐고, 1분기 경제성장률은 전 분기보다 0.1% 증가하는 데 그쳤다. 물가는 뛰는데 경기는 힘을 잃는 흐름이 이어지면 스태그플레이션, 즉 고물가 속 경기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유럽 경제는 지정학적 충돌이 길어질수록 원가 부담과 소비 위축을 동시에 겪기 쉽다.
그럼에도 ECB는 당장 경기 부양보다 물가 안정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나겔 총재는 경기둔화를 감안해도 장기 성장의 전제는 중기 물가 안정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지난달 현재 상황을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단정하기는 이르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당시와 달리 지금은 인플레이션 고착 정도와 노동시장 상황이 다르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다만 중동발 에너지 충격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기대인플레이션까지 더 오를 경우, ECB는 경기 하방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금리 인상에 속도를 낼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앞으로 유로존 금융시장과 기업 자금조달 비용, 가계 대출 부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