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초기 단계 자금 조달 도구로 자리잡은 SAFE(Simple Agreement for Future Equity)가 여전히 창업자와 투자자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다. 2013년 와이 콤비네이터(Y Combinator)가 개발한 이 계약서는 복잡한 조건 없이 자본을 유치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특히 AI와 같이 빠른 시장 진입이 중요한 분야에서 더욱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SAFE는 전환사채와 달리 이자나 만기일이 없고 채권이 아닌 점이 특징이다. 이 계약을 통해 투자자는 향후 라운드에서 주식을 할인된 가치나 상한가를 기준으로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다. 카르타(Carta)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24년 3분기 기준, 사전 가치 평가 없이 진행된 프리프라이스 투자 라운드의 약 90%가 SAFE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이 중 약 85%는 '사후 가치(post-money)' 기준으로 계산됐다.
SAFE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그에 따르는 희석 효과와 조건 협상의 복잡성은 무시할 수 없다. 카르타의 데이터를 보면, 전체 SAFE 투자 중 62%는 상한가(cap)만 설정했고, 29%는 상한가와 할인율(discount)을 모두 포함했다. 단순 할인만 적용된 CASE는 9%에 불과하며, 아무 조건 없는 SAFE는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문제는 다수의 투자자로부터 다양한 조건의 SAFE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경우, 향후 지분 희석 구조(cap table)에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낮은 사후 가치 설정으로 무리하게 자금을 유치할 경우, 창업자의 지분 가치는 단번에 20% 이상 희석될 수 있으며, 이는 후속 투자 유치 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SAFE는 2018년부터 '사전 가치(pre-money)' 방식보다 '사후 가치(post-money)' 방식을 표준으로 전환해왔다. 사후 가치 SAFE는 다음 라운드 직전 회사 전체 가치를 기준으로 투자자의 최소 지분율을 명확히 정해 희석 예측이 쉬운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투자자가 1,500만 달러(약 216억 원)의 사후 가치 상한 하에서 15만 달러(약 2억 2,000만 원)를 투자할 경우, 해당 투자자는 다음 라운드 전 최소 1% 지분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구조는 후속 라운드에서 낮은 기업 가치로 자금 유치가 이루어질 경우, 기존 주주와 창업자의 지분 희석만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가격 결정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다수의 SAFE 계약이 누적되면, 다음 라운드의 자산 가치를 크게 손상시킬 가능성이 존재한다.
창업자 관점에서 SAFE의 강점은 명확하다. 법률 비용이 낮고 협상 시간도 짧으며, 기업 운영에 필수적인 자금을 빠르게 유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도 중심’의 접근은 결국 구조적 혼란과 희석을 초래할 수 있다. 반면 초기 수익 가능성에 베팅하는 엔젤 투자자나 소규모 펀드들에게 SAFE는 매력적인 도구지만, 이는 지분 전환이 전제되지 않는 한 무의미한 종이 조각에 그칠 수 있다.
SAFE는 여전히 초기 시장의 ‘만능 열쇠’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AI, 헬스테크, 피트니스 기술처럼 민첩한 실행력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활발히 채택되고 있다. 하지만 구조적 리스크를 외면한 채 ‘표준’으로 받아들이기엔 그 파급력이 크기에, 창업자라면 투자 유치 초기부터 계약 조건을 철저히 검토하는 것이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