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에서 열린 TOKEN2049 현장은 그야말로 ‘성숙한 시장’의 표본이었다. 2021년의 DeFi Summer나 NFT 광풍이 만들어낸 젊은 혼란과 실험의 열기는 사라지고, 대신 정장은 단정해졌으며 화두는 질서와 규제, 제도로 바뀌었다. 이번 사이클의 주인공은 더 이상 해커나 개발자가 아니라, 기관과 펀드매니저였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혁신’이 아니라 ‘승인’과 ‘적합성’이었다.
이제 블록체인 산업은 명확히 금융의 한 분과로 들어섰다. ETF, RWA(실물자산 토큰화), DATs(디지털자산신탁) — 올해 TOKEN2049를 지배한 단어들이다. 시장의 방향은 명쾌했다. 불확실성을 줄이고,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며,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 하지만 그 안정감 속에는 묘한 공기가 흘렀다. 이 산업이 처음 꿈꾸던 미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TON은 텔레그램 생태계를 등에 업고 ‘블록체인의 대중화’를 내세웠고, Ethena는 이자형 스테이블코인으로 ‘합법적인 수익’을 설계했다. 프로젝트마다 내세운 구호는 다르지만, 모두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했다 — “제도권과 함께 가야 한다.” 이는 산업의 성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상상력이 멈춘 신호이기도 하다.
2021년, 우리는 탈중앙화된 금융을 상상했고, NFT를 통해 예술의 민주화를 말했으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경제를 그렸다. 그 시절의 ‘무모한 광기’는 종종 실패했지만, 그 실패가 곧 혁신의 증거였다.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감독당국의 인준서류’와 ‘기관용 상품 설명서’다. 혁신의 무대가 아니라, 회계 보고서가 산업의 중심이 됐다.
이런 변화는 피로의 결과이기도 하다. 블록체인 업계는 지난 몇 년간 거품과 붕괴를 반복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제는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안정은 방향이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쉼표일 뿐이다. 쉼표를 마침표로 착각할 때, 산업은 멈춘다.
TOKEN2049는 그 멈춤의 풍경을 보여줬다. 부스마다 AI, DePIN, SocialFi가 등장했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새로운 서사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어디에 투자하면 안전한가”만이 공통된 질문이었다. NFT가 예술을 흔들고, DeFi가 은행의 존재 이유를 흔들던 그 시절의 긴장은 이제 사라졌다. 산업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이야기는 죽었다.
지금 블록체인 시장이 진짜로 직면한 문제는 가격이 아니다. ETF 승인도, 금리 인하도, 새로운 L2 기술도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우리가 잃은 것은 ‘상상력’이다. TOKEN2049가 남긴 진짜 질문은 단 하나다.
“블록체인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다음 사이클은 혁신의 계절이 아니라, 금융의 파생상품으로 전락한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자본이 아니라, 다시 꿈꾸는 용기다. 그리고 그 용기는, 제도가 아닌 상상력에서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