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국제표준화기구(ISO)를 비롯한 글로벌 표준 설정기구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하며, 전통적으로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온 기술 규칙의 중심에 뛰어들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세계 제조업 질서를 재편하려는 중국의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과거에는 저가 공산품의 생산기지로 여겨졌던 중국이 최근 기술 선도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 핵심 전략 중 하나가 바로 국제 기술 표준을 주도하는 것이다. 기술 표준은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방식만 결정하지 않는다. 표준을 선점한 국가는 관련 부품, 장비, 설계 방식 등 전반적인 공급망에서 주도권을 갖게 되며, 특허와 라이선스 수익까지 연결될 수 있다. 때문에 미국 인텔, 독일 지멘스 같은 기업이 과거에 강력한 표준 전쟁을 벌였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9월 18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으로 중국은 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국제 표준 기구에서 총 1,337건의 표준을 주도했다. 이는 당시 전체 국제 표준 가운데 약 5%에 해당하며, 이후 2024년에는 ISO 기준만 따져도 1,533개 중 142건을 주도해 9%까지 점유율이 올라갔다. 이처럼 표준 분야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숫자상으로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표준화 활동은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 아래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2023년 '표준화 인재 육성 행동계획'을 내세워 15개 이상 대학이 참여하는 60여 개 국제표준화 혁신팀을 조직했다. 국유기업에는 국제 표준 제정 실적을 경영성과 지표 중 하나로 반영하며, 민간기업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가전업체 하이얼이다. 하이얼은 글로벌 연구개발센터를 10곳 이상 운영하며 국제 표준 경쟁에 뛰어들었고, 현재 세계 가전 관련 특허의 70%를 보유하게 됐다.
표준화는 기술 경쟁력 향상뿐 아니라 무역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한다. 예컨대 중국 주도로 ISO에서 나노다이아몬드 소재나 자율주행시험 시나리오 등의 기술 표준이 선정되고 있으며, 고령자 돌봄 로봇 관련 표준도 IEC에서 중국이 큰 역할을 했다. 독일 기계공학산업협회는 이에 대해 “중국이 자국 이익 실현을 위해 국제 표준 경쟁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흐름은 중국이 장기적으로 글로벌 기술 질서의 중심국으로 부상하려는 계획과 맞물려 있다. 지금까지의 ‘표준 수용자’에서 ‘표준 선도국’으로 포지션을 바꾼 중국은 점점 더 국제 산업 지형에서 존재감을 키워갈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이 추세가 향후 기술 패권과 무역 구조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