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이 코로나19, 지정학적 갈등 등 반복되는 충격에 직면하면서 제조업계를 중심으로 AI 기반 대응 전략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물결을 가장 실감 있게 보여준 자리가 바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에피코 인사이트 2025(Epicor Insights 2025)' 행사다. 글로벌 ERP 기업 에피코(Epicor Software Corp)는 이 자리에서 AI를 활용한 공급망 회복력 강화를 핵심 화두로 내세우며, 현장 실무자 중심의 실용적 AI 접근법을 강조했다.
에피코의 바이바브 보라(Vaibhav Vohra) 사장은 “미국의 공급망에는 약 500만 개의 일자리가 공석 상태며, 공장 4곳 중 한 곳은 숙련 인력 부족으로 성과가 저조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배터리용 희토류부터 주택 공급용 목재에 이르기까지 핵심 원자재 부족 현상이 겹치며 제조업계 전반이 큰 압박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기업 상당수는 1차 부품 공급업체 이상의 가시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정밀한 대응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에피코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AI 주도’가 아니라 ‘문제 중심’의 AI 활용 전략을 제시했다. CTO 아르투로 부살리노(Arturo Buzzalino)는 “AI의 가치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고객 공정 내에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라며 “우리는 현장에서 단일 업무 문제를 깊이 파악한 후, 해당 문제에 최적화된 AI 기능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밝혔다. 이후 효과가 검증된 AI 기능은 에피코의 핵심 플랫폼, '프리즘(Prism)'에 통합돼 보다 넓은 사용자층에게 제공된다.
AI 기능과 ERP(전사적자원관리)를 통합한 이 같은 방식은 제조, 유통 등 전통 산업 종사자가 AI를 보다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만든다는 평가다. 프리즘에 포함된 대규모언어모델(LLM) 추론 파이프라인은 오픈AI, 앤트로픽, Llama 등 다양한 모델과 연동이 가능하며, 고객사의 실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유연한 예측을 수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은 하루 단위 계획이 아니라 초단위 의사결정이 가능한 민첩성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망 붕괴는 디지털 전환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에 비해 탄탄한 데이터 기반과 멀티 시나리오 대응체계를 마련한 기업은 위기 속에서도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 부살리노는 “2019년의 경험은 공급망 복원력 측면에서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을 이끌어냈다”고 진단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희토류 공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AI 기반 대응 사례도 소개됐다. 에피코는 공급업체 데이터와 최신 규제, 관세 정보를 결합해 대체 공급처를 발굴하거나, 탄소 정보를 회계와 규제 시스템에 통합하는 ‘탄소 비용 통합 솔루션’ 등을 선보이며 기업의 규제 준수와 지속가능성 향상을 동시에 지원하고 있다.
또한 에피코는 기존 제품 구성(CPQ) 솔루션에 3D 시각화를 결합해 공정 이해도와 고객 만족도를 끌어올리는 기능, 공급업체 역량을 자동 평가하는 '아카디아(Acadia)' 플랫폼을 인수하며 공급망 전반의 민첩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HTS(Harmonized Tariff Schedule), Incoterms 등 글로벌 통상 기준을 ERP에 통합해 실시간 정책 변경에도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이번 ‘에피코 인사이트 2025’에서 확인된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AI는 기술적 신기루가 아니라, 공급망이라는 산업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을 앞세우기보다 문제 해결 중심의 실용적 접근을 통해, AI는 공급망 현장의 인력을 대체하는 대신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글로벌 제조업이 다시 한번 충격에 대비하려면, ERP를 데이터 허브로 삼은 전략적 AI 통합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