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암호화폐 기업을 외면하던 미국의 대형 은행들이 최근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 기술을 적극 수용하는 흐름으로 전환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암호화폐를 보유하거나 블록체인 기반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들은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유지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실제로 최근 3년 동안 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건, 웰스파고, 씨티은행 등 미국 대형 은행 4곳이 전체 디뱅킹(계좌 폐쇄) 불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바 있다.
그러나 '초크포인트 작전(Operation Chokepoint 2.0)'과 증권거래위원회(SEC)의 회계 지침 SAB 121 등 주요 규제 조항이 폐지되면서, 은행권에서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고 있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의 활용이 어느 은행이 미래 금융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 스테이블코인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JP모건과 산탄데르(Santander) 같은 대형 금융기관들은 수년 전부터 내부 자금 정산이나 은행 간 결제 같은 영역에 자체 블록체인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들 프로젝트는 대부분 제한적 범위에서 진행됐고, 퍼블릭 체인의 개방성과 효율성은 활용되지 않았다.
현재 퍼블릭 네트워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잠재력은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국제 송금 속도 향상은 물론, 비인가 결제 분쟁을 제거하고 급여 주기 단축이라는 실질적 효용까지 제공한다. 복잡한 급여 전산 시스템에서 스테이블코인의 프로그래머블 특성은 자동화와 비용 절감을 가능하게 한다.
중소형 은행들도 이제야 퍼블릭 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도입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는 2022년 챗GPT 등장 이후 기업들이 인공지능 도입 여부를 검토했던 흐름과 유사하다. 최근에는 커스토디아 뱅크가 이더리움 네트워크에서 자체 스테이블코인 ‘Avit’을 발행하고 저렴하고 신속한 은행 서비스를 제공해 주목을 받았다. 이는 타 금융기관에서도 참고할 만한 사례다.
스테이블코인 기술이 지속적으로 진화하면서 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데이터 분석업체 아르테미스(Artemis)와 듄(Dune)에 따르면, 2024년 2월 1960만 개였던 활성 스테이블코인 지갑 수는 2025년 2월 기준 3,000만 개를 넘겼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8월까지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와이오밍 주는 이미 올해 3월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현재 유통 중인 스테이블코인 중 91%는 법정화폐 기반 자산으로 지원되며, 8.5%만이 암호화폐 담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시장에서 점차 퇴출되는 추세다. 사용자 편의성을 크게 저해하던 초기의 UX 문제들도 개선되면서, 비암호화폐 기업들도 스테이블코인 활용에 진입하기 쉬워졌다.
아울러 더 많은 자산이 온체인 기반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더리움 같은 퍼블릭 네트워크에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는 기업들은 향후의 금융 환경에 더 민첩하게 대처할 수 있다. 또한 스테이블코인이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기존 금융 자산의 디지털화도 가속화되고 있다. 블랙록 최고경영자 래리 핑크는 올해 초 CNBC의 ‘스쿼크박스’ 인터뷰에서 증권거래위원회가 채권과 주식의 토큰화를 조속히 승인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핀테크 강자들과의 경쟁, 금리 변동, 소비자 저축률 감소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은행권에게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도입하는 전략은 제품 경쟁력 강화와 내부 운영 효율 개선을 동시에 노릴 수 있는 핵심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