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파로 세계 원유와 석유제품 공급 차질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전쟁이 당장 끝나더라도 이미 발생한 생산 손실과 인프라 복구 지연 때문에 시장 충격이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23일 파이낸셜타임스와 업계 발언을 종합하면, 스위스 에너지·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비톨의 러셀 하디 최고경영자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파이낸셜타임스 원자재 글로벌 서밋에서 이번 전쟁으로 최소 10억 배럴의 원유·석유제품 손실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는 전 세계 석유 소비량 약 10일 치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 등 30개국이 방출하기로 한 전략비축유 4억2천600만 배럴의 두 배를 넘는 수준이기도 하다. 하디 최고경영자는 개전 이후 걸프 지역 에너지 인프라 공격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하루 약 1천200만 배럴의 원유 생산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석유제품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핵심 통로여서, 이 구간이 막히면 산유국의 생산 여력보다 실제 수출 차질이 더 직접적인 문제로 번지게 된다.
업계는 이번 사태를 과거 중동발 공급 충격보다 더 심각하게 보고 있다. 하디 최고경영자는 약 40년 경력에서 가장 큰 에너지 시장 혼란이라고 평가하며,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보다 규모와 파급력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당시와 달리 지금은 세계 석유 시장 자체가 커졌고, 비상시에 즉시 꺼내 쓸 수 있는 여유 생산능력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남아 있는 여유 생산능력 상당 부분이 호르무즈 해협 바깥으로 자유롭게 나가기 어려운 지리적 제약을 받는다는 점은 시장 불안을 더 키우는 요소로 꼽힌다.
다른 대형 트레이딩 업체들도 비슷한 우려를 내놓고 있다. 군보르의 게리 페더슨 최고경영자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길어질 경우 공급망 전반에 심각한 파급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군보르의 프레데릭 라세르 리서치 책임자는 해협이 3개월 안에 다시 열리지 않으면 에너지 문제가 거시경제 문제로 번져 세계 경제가 침체에 들어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면 트라피구라의 리처드 홀텀 최고경영자는 부유한 국가들은 높은 가격을 감수하면서 물량을 먼저 확보해 물리적 공급 부족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다만 이 경우 구매력이 약한 국가들에 부담이 집중돼, 같은 공급 충격이라도 국가별 체감 피해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정유 부문의 병목도 이번 위기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에너지 애스펙츠의 암리타 센 시장정보 책임자는 5월 말까지 호르무즈 해협 통행량이 평시의 50% 수준으로 회복되는 비교적 낙관적인 경우에도 디젤과 휘발유 같은 석유제품 약 4억5천만 배럴이 시장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원유만 확보된다고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제 연료로 바꾸는 정유 설비에 여유가 부족해 손실분을 빠르게 만회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는 고유가로 수요가 크게 줄지 않는 한 이런 부족분은 적어도 2030년까지 보충되기 어렵다고 봤다. 이 같은 흐름은 앞으로 국제유가 급등뿐 아니라 국가 간 에너지 확보 경쟁, 취약국의 수입 부담 확대, 세계 성장률 둔화 우려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