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는 5천만 국민이 매일 쓰는 돈이다. 그런데 디지털 세계로 한 발만 들어서면 풍경이 딴판이다. 국내 거래소에서조차 사람들이 실제로 주고받는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전부 달러 기반인 USDT·USDC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반올림하면 0에 수렴할 만큼 존재감이 없다. 우리 안방의 온체인 결제망을 달러가 먼저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변방의 투기 수단이 아니다. 해외 송금과 급여 지급을 처리하고, 국경 간 무역을 받치며, 온체인 시장의 '현금 다리' 노릇을 하는 현실의 결제 인프라가 됐다. 이 레일 위로 돈이 더 흐를수록 그 돈이 어떤 통화냐가 중요해진다. 달러가 표준이 되면 한국은 자국 통화로 자국민의 디지털 거래조차 정산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것은 단순한 신사업 기회의 문제가 아니라 통화주권의 문제다.
해법은 명백해 보인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된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발행은 한 번도 어려운 일이었던 적이 없다. 진짜 난제는 사람과 기업이 그것을 '쓰게' 만드는 일이다. 자금과 브랜드를 앞세운 숱한 프로젝트가 사용처를 확보하지 못해 무너졌다. 사람들이 보유하고, 가맹점이 받고, 거래소가 상장하고, 기관이 업무에 연결해 넣어야 비로소 화폐가 된다. 유통이 유동성을 낳고, 유동성이 채택을 낳는다.
다행히 한국이 그리는 밑그림의 방향은 옳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은행이 지분 50%+1주를 가진 컨소시엄에 발행을 우선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이는 통화 안정성을 앞세운 한국은행의 우려를 반영한 절충이다. 주목할 것은 지금 짜이는 컨소시엄들이 단순한 발행사가 아니라 '유통 동맹'이라는 점이다. 하나금융은 1조 원에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 지분을 사들였고, 외환망과 업비트, 네이버페이·쇼핑이 결합한 최대 생태계 구상이 거론된다. KB금융은 토스·빗썸과, 신한은 삼성금융과, 우리·농협은 카카오와의 협력을 타진하고 있다. 은행은 예금과 결제·외환 인프라를, 플랫폼과 거래소는 수천만 이용자를 이미 손에 쥐고 있다. 유통이 가장 어려운 과제라면, 이들은 그 답을 처음부터 들고 출발하는 셈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시간이다. 우리가 발행 주체와 지분 구조를 놓고 다투는 사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뿌리는 매일 더 깊어진다. 통화주권의 골든타임은 길지 않다. 둘째, 자칫 '발행은 됐으나 쓰이지 않는' 코인이 될 위험이다. 은행이 리스크 관리에만 매달려 자사 앱을 통한 유통을 외면하고 입출금을 거래소에만 떠넘기면, 접근성은 떨어지고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장부 위의 박제로 남는다. 통화 신뢰를 명분으로 발행 주체를 지나치게 좁히면 혁신이 질식할 수 있다는 경고도 흘려들어선 안 된다.
정부와 국회는 입법을 서둘러 매듭짓되, 그 법을 '쓰이는 화폐'를 만드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수초 만에 끝나는 국경 간 결제, 24시간 돌아가는 기업 자금관리, 영업시간에 묶이지 않는 담보 이전 — 이런 실제 쓸모가 수천만의 손 위에서 작동할 때라야 원화는 비로소 온체인 화폐 전쟁에서 자기 자리를 갖는다. 발행만 하고 아무도 쓰지 않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통화주권을 단 한 뼘도 지켜주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