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 가기
  • 공유 공유
  • 댓글 댓글
  • 추천 추천
  • 스크랩 스크랩
  • 인쇄 인쇄
  • 글자크기 글자크기
링크 복사 완료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

[사설] 비트코인이 쫓아낸 중개자는, 다시 돌아왔다

댓글 0
좋아요 비화설화 0

‘탈중앙화’는 구호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한국은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금융의 규칙을 쓰기 전에, 누가 통제하고 누가 책임지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TokenPost.ai

TokenPost.ai

블록체인은 하나의 약속에서 출발했다. 누구도 믿지 않아도 되는 돈을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2009년 비트코인은 그렇게 태어났다. 은행도, 중앙은행도, 정부도 거치지 않는 결제. 거래를 보증한다는 명목으로 가운데 앉아 수수료와 권한을 가져가던 중개자를 없애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첫 블록에는 영국 재무장관의 은행 구제금융 관련 신문 문구가 새겨졌다. 출발부터 분명했다. 비트코인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기성 금융질서에 대한 반론이었다. 돈을 누가 발행하는가. 장부를 누가 관리하는가. 거래를 누가 허락하는가. 이 세 질문을 중앙기관이 아니라 프로토콜과 네트워크에 맡기겠다는 시도였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났다. 유럽 경제정책 연구기관 CEPR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는 이 약속의 성적표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결론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역설이다.

성공은 분명하다. 비트코인은 중앙 권력의 명령 없이도 10분마다 블록을 쌓아 올렸다. 서로 모르는 전 세계 참여자들이 같은 장부에 합의했고, 같은 돈을 두 번 쓰는 부정도 막아냈다. 이더리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약을 코드로 집행하는 스마트계약을 대중화했다. 돈의 탈중앙화가 계약의 탈중앙화로 확장된 것이다. 이 성과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블록체인은 적어도 한 가지를 증명했다. 신뢰는 반드시 중앙기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다음에 나타났다. 중개자를 없애겠다던 기술이, 다른 모습의 중개자를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대표적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의 빠른 이전성과 달러 같은 법정화폐의 안정성을 결합한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그 안정은 순수한 탈중앙화에서 나오지 않는다. 주요 스테이블코인은 민간 발행사가 찍어내고, 준비자산은 국채·예금·금융상품 등 현실 세계 자산에 묶여 있다. 장부는 블록체인 위에 있지만, 신뢰의 핵심은 다시 발행사와 수탁기관, 감사인, 은행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 금융은 원래 신뢰의 층위 위에서 작동한다. 문제는 스테이블코인이 ‘탈중앙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도, 실제 위험은 중앙화된 발행사와 준비금 관리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준비자산이 불투명하면 이용자는 발행사를 믿을 수밖에 없다. 준비금이 특정 은행이나 특정 자산에 몰리면 위기 때 상환 약속이 흔들린다. 발행사가 환매를 늦추거나 제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디지털 달러가 아니라 사설 은행권에 가깝다. 비트코인이 피하려 했던 위험이 다른 이름으로 돌아온 셈이다.

탈중앙금융, 즉 디파이도 다르지 않다. 사람 중개인을 알고리즘으로 대체했지만, 그 자리에 더 복잡한 권력 구조가 생겼다. 거래가 블록체인에 공개되는 투명성은 장점이지만, 동시에 약점이 됐다. 남의 주문을 미리 보고 앞뒤로 거래를 끼워 넣어 차익을 빼내는 이른바 ‘샌드위치 공격’이 가능해졌다. 기존 금융시장에서 문제 되던 선행매매가 온체인 시장에서 새 옷을 입고 되살아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새로운 집중화다. 이더리움에서는 거래를 모아 블록을 구성하는 ‘빌더’라는 주체가 중요해졌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크라지만, 실제 블록 구성 권한은 소수에게 쏠릴 수 있다. 탈중앙화를 내세운 시장이 다시 거대 중개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알고리즘이 들어왔고, 알고리즘 뒤에는 다시 경제적 권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자리 잡았다. 중개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더 기술적인 이름표를 달고 돌아왔다.

실물자산 토큰화도 같은 함정을 안고 있다. 부동산, 채권, 주식, 문화상품권, 포인트를 토큰으로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토큰이 현실의 권리를 자동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부동산 토큰을 넘겼다고 해서 등기부상 소유권이 저절로 이전되는 것은 아니다. 채권 토큰을 보유했다고 해서 법원이 그 권리를 당연히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현실 세계의 자산을 블록체인 안으로 가져오는 순간, 공증인, 예탁기관, 법원, 감독당국, 오라클이 다시 필요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나온다. 탈중앙화는 중앙기관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신뢰의 위치를 바꾸는 일이다. 은행의 신뢰를 프로토콜의 신뢰로, 거래소의 신뢰를 스마트계약의 신뢰로, 감독기관의 신뢰를 투명한 장부와 실시간 검증의 신뢰로 옮기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이동이 잘못 설계되면, 낡은 중개자보다 더 불투명한 새 중개자가 탄생한다.

한국은 지금 바로 이 갈림길에 서 있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원화 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 실물자산 토큰화가 동시에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논의는 여전히 “허용할 것인가, 막을 것인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는 너무 낡은 질문이다. 진짜 질문은 따로 있다. 누가 발행하는가. 누가 장부를 관리하는가. 누가 준비금을 보관하는가. 누가 외부 정보를 검증하는가. 사고가 났을 때 누가 책임지는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논한다면 담보 비율만 외칠 일이 아니다. 준비금이 안전하고 유동적인 자산으로 관리되는지, 특정 기관에 과도하게 집중되지 않는지, 매일 검증 가능한지, 이용자의 상환권이 법적으로 보장되는지부터 정해야 한다. 발행사가 위기 때 환매를 제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제 혁신이 아니라 새로운 금융 불안을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코인 산업의 상품이 아니라 국가 결제 인프라의 일부로 다뤄야 한다.

토큰증권과 조각투자도 마찬가지다. 자산을 잘게 쪼개는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쪼개진 권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보호되는지다. 토큰 보유자가 배당, 이자, 의결권, 상환권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온체인 기록과 오프체인 권리가 충돌할 때 이를 바로잡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토큰화는 유동성을 높일 수 있지만, 권리관계가 불명확하면 유동성이 아니라 분쟁만 키운다.

디파이에 대해서도 환상은 금물이다. “중개자가 없다”는 말만 믿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누가 프런트엔드를 운영하는지, 누가 오라클을 통제하는지, 누가 블록 구성에서 우위를 갖는지, 유동성 공급자는 어떤 손실을 부담하는지 봐야 한다. 금융의 본질은 이름이 아니라 권한과 책임이다. 탈중앙화라는 간판 아래 권한은 집중되고 책임은 흩어진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규제 회피다.

본지는 이 기술을 환영한다. 블록체인은 분명 권력과 중개자의 지대를 흔드는 혁신이다. 비트코인은 중앙기관 없이도 장부가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줬고, 이더리움은 계약 집행이 코드로 자동화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금융은 결제와 정산, 자산 이전의 속도를 바꿀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 흐름을 막는 나라는 금융 인프라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환영과 환상은 다르다. 블록체인은 만능 해법이 아니다. 탈중앙화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설계와 감독의 대상이다. 시장은 빈자리를 싫어한다. 기존 중개자가 사라지면 새로운 중개자가 나타난다. 그 중개자가 은행일 수도 있고, 발행사일 수도 있고, 오라클일 수도 있고, 빌더일 수도 있다. 이름이 달라졌다고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써야 할 것은 더 멋진 구호가 아니다. 더 정교한 규칙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통화주권과 이용자 보호의 틀 안에서 설계돼야 한다. 토큰증권은 현실의 권리와 법적 집행을 기준으로 정비돼야 한다. 디파이는 실제 권한 집중과 시장 조작 가능성을 기준으로 감시돼야 한다. 기술은 열어주되, 책임은 흐리지 말아야 한다.

비트코인이 쫓아낸 중개자는 다시 돌아왔다. 이제 질문은 중개자를 없앨 수 있느냐가 아니다. 어떤 중개자를 허용하고, 어떤 중개자를 견제하며, 어떤 신뢰를 공적 규칙 안에 묶어둘 것인가다. 디지털자산의 다음 경쟁은 코인 가격이 아니라 신뢰 설계에서 갈린다. 한국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블록체인을 숭배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새 금융질서의 장부를 누가 쓰고, 누가 검증하고, 누가 책임질지 정하는 일이다. 그것이 탈중앙화 시대의 진짜 중앙 과제다.

본 기사는 시장 데이터 및 차트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광고문의 기사제보 보도자료

많이 본 기사

alpha icon

지금 꼭 알아야 할 리포트

관련된 다른 기사

댓글

댓글

0

추천

0

스크랩

스크랩

데일리 스탬프

0

말풍선 꼬리

매일 스탬프를 찍을 수 있어요!

데일리 스탬프를 찍은 회원이 없습니다.
첫 스탬프를 찍어 보세요!

댓글 0

댓글 문구 추천

좋은기사 감사해요 후속기사 원해요 탁월한 분석이에요

0/1000

댓글 문구 추천

좋은기사 감사해요 후속기사 원해요 탁월한 분석이에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