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디지털 자산과 블록체인 기반 금융의 확산 속도를 점검하며, 토큰화 시장이 본격적인 ‘초기 확장 단계’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시장 규모는 아직 작지만 성장 속도와 제도권 참여 확대가 금융 시스템 전반에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14일 ECB가 발표한 ‘거시건전성 보고서(Macroprudential Bulletin)’에 따르면,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 토큰화 자산 규모는 2024년 초 84억달러(약 12조4,000억원)에서 2026년 2월 기준 450억달러(약 66조6,000억원)로 급증했다. 이는 전통 금융시장에 비하면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기관 참여가 늘면서 기술 검증 단계를 넘어 실사용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CB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자체 인프라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폰테스·아피아’로 인프라 구축…중앙은행 화폐 결제 연결
유로시스템은 오는 2026년 3분기 출시를 목표로 ‘폰테스(Pontes)’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는 분산원장기술(DLT) 기반 시장 플랫폼을 ECB의 결제 시스템인 ‘TARGET 서비스’와 연결해 토큰화 자산 거래를 중앙은행 화폐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더해 ‘아피아(Appia)’라는 로드맵을 통해 유로존 전반의 디지털 금융 생태계를 통합하는 장기 계획도 병행한다. ECB는 2026년 3월부터 DLT 기반 자산을 담보로 인정하기 시작하며 제도권 편입을 본격화했다.
이는 토큰화 시장이 단순 실험 단계를 넘어 실제 금융 인프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조치로 해석된다.
토큰화 채권, 발행 효율 개선…유동성은 여전히 과제
보고서는 유럽 기업들이 발행한 토큰화 채권을 분석한 결과, 발행 과정에서 분명한 효율 개선이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스마트컨트랙트를 활용하면 결제 기간 단축과 비용 절감이 가능해 기존 채권 발행 구조보다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2차 시장 유동성은 여전히 가장 큰 장애물로 지목됐다. 시장 규모 자체가 작고 활발한 온체인 거래 환경이 부족해 투자자 접근성과 확장성이 제한된다는 지적이다.
ECB는 규제 조화와 함께 2차 시장 활성화가 이뤄져야 토큰화 채권이 ‘틈새 실험’에서 ‘핵심 금융 인프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24년 7월 슬로베니아의 DLT 기반 국채 발행은 의미 있는 첫 사례로 평가되지만, 보다 광범위한 참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토큰화 MMF, 효율성↑…리스크도 함께 확대
토큰화 머니마켓펀드(TMMF) 역시 빠르게 성장 중이다. 해당 상품은 펀드 지분을 토큰 형태로 발행해 블록체인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ECB는 빠른 결제, 24시간 거래 가능성, 프로그래머블 구조 등에서 분명한 장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온체인 담보 활용 등 기존 금융에서는 어려웠던 새로운 활용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 머니마켓펀드가 갖고 있던 유동성 불일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며, 오히려 DLT의 복잡성이 새로운 취약성을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술이 리스크를 제거하기보다 ‘형태를 바꿔 이전’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이다.
유로 스테이블코인, 국채 수요 바꿀 변수
보고서는 MiCAR 규제를 준수하는 유로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확대가 유로존 국채 수요에 미칠 영향도 주목했다.
현재 테더와 서클 같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미 국채 시장에서 중요한 수요 주체로 자리 잡았다. ECB는 유로 스테이블코인도 유사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만 발행 주체에 따라 영향은 크게 달라진다. 은행과 전자화폐기관은 준비금 구성 요건이 다르며, 이것이 국채 투자로 이어지는 비율에도 차이를 만든다.
ECB는 MiCAR의 규제 구조가 한편으로는 준비금을 안전 자산에 묶어 ‘충격 흡수 장치’로 작동할 수 있지만, 반대로 유동성 관리 실패 시 은행권으로 리스크가 전이되는 ‘전염 경로’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기술이 리스크 없애지 않는다”…규제 병행 필요
ECB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디지털 금융 혁신이 더 이상 실험 단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동시에 폰테스, 아피아, 담보 정책 등 다양한 정책 도구를 통해 인프라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다만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새로운 기술이 기존 금융 리스크를 제거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위치와 형태를 바꿔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결국 토큰화와 DLT 기반 금융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뿐 아니라 규제 체계와 시장 구조의 정교한 설계가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 ECB의 결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