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만 해도 스타트업이 1억달러, 원화 약 1,520억7000만원 이상을 유치하면 ‘슈퍼자이언트 라운드’로 불릴 만큼 이례적인 거래로 평가됐다. 하지만 지금 미국 벤처시장에서는 이 기준이 더는 특별하지 않다. 올해 미국 후기 단계 스타트업의 중간 투자 유치 규모가 정확히 1억달러로 집계되면서, 과거의 ‘초대형 라운드’가 이제는 일상적인 자금조달 단위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크런치베이스 자료에 따르면 2026년 들어 현재까지 미국 스타트업은 1억달러 이상 투자를 받은 사례만 250건을 기록했다. 이 흐름이 이어지면 지난해보다 거래 건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전체 자금 조달 규모는 이미 사상 최고 수준에 올라섰다. 오픈AI와 앤스로픽을 비롯한 일부 인공지능, AI 기업들이 수십억달러 단위의 초대형 라운드를 잇달아 성사시키면서 전체 시장을 끌어올린 영향이 크다.
대형 투자 라운드, 2021년 정점 뒤 AI 열풍으로 재가속
1억달러 이상 투자 라운드의 확산은 한 번에 이뤄진 변화는 아니다. 2010년대 후반 우버, 리비안, 위워크 같은 기업들이 기업공개를 앞두고 대규모 후기 투자를 받기 시작하면서 이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졌다. 이후 2021년 강세장에서 거래가 정점을 찍었고, 금리 상승과 투자 심리 위축으로 한동안 주춤했다.
그런데 최근 AI 투자 열풍이 시장 구도를 다시 바꿨다. 거래 건수 자체는 2021년 전성기보다 아직 적지만, 개별 라운드 규모는 훨씬 더 커졌다. 시장 자금이 소수의 ‘뜨거운’ 기업에 집중되면서 건수보다 금액이 더 빠르게 불어나는 구조가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올해 1억달러 이상 투자를 유치한 250건 가운데 절반은 2억달러, 원화 약 3,041억4000만원 이상이었다. 이 중 18건은 10억달러, 원화 약 1조5207억원을 넘겼다. 후기 단계 투자에서 ‘대형’의 기준선 자체가 한 단계 더 높아진 셈이다.
후기 투자 중간값도 2배 상승… 밸류에이션 부담도 함께 커져
후기 단계 스타트업의 중간 라운드 규모도 뚜렷하게 커졌다. 크런치베이스에 따르면 2020년 5000만달러를 조금 웃돌던 후기 단계 투자 중간값은 올해 약 1억달러 수준으로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이는 단순히 일부 예외적 사례가 평균을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시장 전반의 자금조달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와 함께 기업가치도 가파르게 뛰고 있다. 올해 미국에서 1억달러 이상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 가운데 21곳은 투자 이전 기업가치, 프리머니 밸류에이션이 100억달러를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상장한 세리브라스 시스템스도 이 범주에 포함됐다. 여기에 앤스로픽과 오픈AI는 비공개 방식으로 기업공개를 준비 중이며, 시장에서는 두 회사의 기업가치가 1조달러에 근접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결국 지금의 벤처시장은 단순히 큰돈이 오가는 국면이 아니다. 투자자들이 과거보다 훨씬 높은 기업가치에 자금을 집행하면서도, 그만큼 더 큰 수익을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다. 다만 이런 기대가 실제로 입증될지는 결국 상장 이후 공개시장이 얼마나 이를 받아줄지에 달려 있다. AI 중심의 초대형 투자 흐름이 이어지고 있지만, 시장의 최종 평가는 앞으로 몇 달간 공모와 상장 성과에서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