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오랜 기간 과학기술계의 연구 생산성을 저해해왔다는 지적을 받아온 ‘연구과제중심제도(PBS)’를 5년 내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관련 예산을 각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고유 임무와 전략에 맞춘 대형 사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출연연 중심의 책임성과 전략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PBS는 연구자가 외부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와 간접비를 충당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경쟁을 유도해 연구 효율성을 높이려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연구자들이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게 만들고, 과제를 파편화시켜 장기적이고 대형 연구 추진을 어렵게 만든다는 비판이 이어져 왔다. 이에 정부는 출입연들의 독립성과 책무성을 제고하기 위해 예산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결단을 내린 셈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산하 연구기관 예산 중 약 6조 4천억 원 규모의 예산 중 수탁과제 2조 5천억 원을 향후 5년간 단계적으로 회수해 출연금 형태로 바꾸고, 이를 ‘기관전략개발단’이라는 새로운 틀로 운영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 단위는 단순한 연구 과제를 넘어 국가 전략기술 육성, 산업화 연계, 사회 문제 해결 등 구체적인 정책 목적을 설정하고 산·학·연 협업을 통해 실질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 종료되는 PBS 기반의 수탁과제가 약 1,877개, 금액으로는 4,685억 원 규모에 달하는데, 이 예산을 바탕으로 출범할 기관전략개발단이 내년부터 본격 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총 62개의 전략개발단이 경쟁을 통해 선정돼 준비 중이며, 각 단위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화하는 한편 NST 산하 전담 평가센터를 통해 성과 관리와 사업 조정을 받게 된다.
성과 중심의 인센티브 제도도 도입된다. 예컨대 대형 프로젝트를 조기에 성공적으로 완료할 경우, 잔여 예산을 연구자들에게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PBS 제도 폐지로 사라질 수 있는 인센티브에 대한 우려를 완화하는 동시에, 연구자들의 동기를 높이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아울러 박사후연구원 지원 프로그램도 확대되면서, ‘이노코어’ 사업을 통해 연봉 9천만 원 이상 조건으로 600명의 후속 인력을 전략개발단 핵심 인력으로 투입하는 계획도 추진된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변화로 출연연의 고유 임무와 책임(R&R)이 더욱 명확해지고, 대형 연구 중심의 장기 전략 수립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다만, 자원 배분 권한이 정부 중심으로 쏠릴 경우 현장의 자율성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특히 기존에 산학연으로 구분돼 부처별로 배분되던 수탁과제를 출연연 중심으로 몰아줄 경우, 각 부처의 반발이나 조정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같은 흐름은 향후 정부출연연이 국가 과학기술 개발을 이끄는 주축으로 기능하면서도 스스로의 전략과 책임 아래 연구를 수행하는 구조로 전환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PBS라는 제도의 한계를 넘어선 새 예산 구조가 연구 품질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