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컴 테크놀로지스가 차세대 확장현실(XR) 기기용 신규 칩 ‘스냅드래곤 리얼리티 엘리트’를 공개했다. 기존 XR 전용 칩 브랜드를 새로 바꾼 수준을 넘어, 혼합현실과 가상현실 기기의 두뇌를 ‘온디바이스 AI 플랫폼’으로 재정의하려는 전략이 담겼다.
이번에 공개된 리얼리티 엘리트는 2024년 증강현실 박람회에서 발표된 XR2+ 2세대의 후속작이다. 퀄컴은 이름에서 ‘XR’를 덜어내고 ‘리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며, 칩의 역할이 단순 그래픽 처리에서 개인형 AI 구동으로 확장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기 내부에서 대규모 언어모델을 직접 처리할 수 있도록 신경망처리장치(NPU) 성능을 대폭 끌어올린 것이 핵심이다.
시장 흐름도 이와 맞물린다. 구글은 2024년 12월 혼합현실 운영체제 ‘안드로이드 XR’을 공개한 데 이어, 2025년 HTC 바이브 테크와 협력에 나섰고 2025년과 2026년 I/O 개발자 행사에서는 제미나이 기반 스마트 안경을 선보였다. XR 생태계의 중심축이 디스플레이 성능 경쟁에서 ‘AI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일상 기기에 녹여내느냐’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퀄컴의 지아드 아스가르 XR·웨어러블·퍼스널 AI 부문 총괄 수석부사장은 “이미 시장에는 6천만대 이상의 XR 기기가 보급돼 있으며, 산업 전반에서 채택이 확대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더 작고, 더 똑똑하고, 더 효율적인 칩이 하루 종일 착용하는 혼합현실 기기의 수요를 받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얼리티 엘리트의 수치도 이런 방향을 뒷받침한다. 이 칩은 최대 48TOPS의 온디바이스 AI 성능을 제공하며, 30억개 매개변수 규모의 라마 계열 대형언어모델을 2000 컨텍스트 윈도 안에서 처리할 수 있다고 퀄컴은 설명했다. 번역, 요약, 질의응답 같은 비교적 가벼운 작업은 기기 안에서 바로 처리하고, 무거운 연산만 클라우드로 넘기는 방식이다. 지연시간을 줄이고 개인정보를 기기 내부에 머물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엣지 AI’ 경쟁력으로 읽힌다.
연산 성능도 개선됐다. 그래픽처리장치(GPU) 성능은 최대 60%, 중앙처리장치(CPU)는 최대 30%, 신경망처리장치 성능은 최대 160% 향상됐다고 퀄컴은 밝혔다. 특히 회사는 전력 효율을 전면에 내세웠다. 동일 작업 기준 배터리 지속시간은 최대 20% 늘었고, 고부하 환경에서는 온도를 최대 섭씨 12도 낮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발열은 배터리와 칩 수명, 착용감에 직결되기 때문에 XR 기기에서는 성능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스마트 안경 확산 속 ‘AI+웨어러블’ 주도권 경쟁
퀄컴의 이번 발표는 스마트 안경 시장의 성장세와도 맞닿아 있다. 현재 2026년 출하량 증가분의 상당수는 화면이 없는 오디오 중심 스마트 안경이 차지하고 있다. 대표 사례는 메타 플랫폼스의 레이밴 브랜드 스마트 안경이다. 이런 제품은 사용자가 음성으로 AI와 대화하고, 내장 카메라를 통해 주변 환경을 인식한 뒤 필요한 정보를 스마트폰 등 다른 기기와 연동해 제공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결국 시장은 무거운 헤드셋보다 가볍고 일상적인 웨어러블로 이동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작은 폼팩터 안에 충분한 AI 성능과 배터리 효율, 발열 제어를 얼마나 담아내느냐다. 퀄컴이 리얼리티 엘리트를 ‘메타버스 칩’이 아니라 ‘개인형 AI 칩’으로 포지셔닝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Xreal ‘프로젝트 아우라’ 탑재…안드로이드 XR 생태계 확장
퀄컴은 리얼리티 엘리트가 구글의 안드로이드 XR을 포함한 XR 생태계의 핵심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XR 안경 개발사 엑스리얼은 올해 말 리얼리티 엘리트를 탑재한 ‘프로젝트 아우라’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 밖에 플레이 포 드림의 차기 기기 등 후속 제품군도 이 칩을 채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엑스리얼 공동창업자 쉬치(Chi Xu)는 “프로젝트 아우라는 광학 시스루 XR 안경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며 “스냅드래곤 리얼리티 엘리트는 그 성과의 기반”이라고 말했다.
‘스냅드래곤 START’로 제조사까지 묶는다
퀄컴은 하드웨어 칩 공급에 그치지 않고, 스마트 기기 설계를 돕는 통합 솔루션 ‘스냅드래곤 스타트(START)’도 함께 밀고 있다. 정식 명칭은 ‘확장형 턴키 AI 레디 툴킷’으로, 우선 스마트 안경 제조를 위한 레퍼런스 설계와 개발 체계를 제공한다.
이는 퀄컴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초기 시절 맡았던 ‘킹메이커’ 역할을 웨어러블 시장에서 다시 노리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구조는 2012년 스마트폰용 퀄컴 레퍼런스 디자인 프로그램과 유사하다. 제조사는 이를 바탕으로 제품 설계를 단축할 수 있고, 퀄컴은 칩과 미들웨어, 설계 기준을 한꺼번에 공급하며 생태계 주도권을 강화할 수 있다.
첫 파트너로는 글로벌 안경 기업 인스펙스 그룹이 합류했다. 이 회사는 바버, CAT, 슈퍼드라이, 오닐 등 라이선스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이 밖에 페가트론, 썬더컴, 아베간트, 조르진 등 제조·광학 기업도 협력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퀄컴은 나아가 단순 참고 설계를 넘어 ‘화이트라벨’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제조사가 디자인을 가져오면 이를 실제 제품으로 제작하고 브랜드 로고만 입혀 출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중소형 웨어러블 제조사 입장에서는 개발 진입장벽을 크게 낮출 수 있는 구조다.
리얼리티 엘리트와 스냅드래곤 스타트의 조합은 퀄컴이 XR 시장을 단순 부품 공급처가 아니라 ‘AI 웨어러블 플랫폼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신호에 가깝다. 스마트 안경과 혼합현실 기기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될 경우, 승부는 더 선명한 화면보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오래 가는 개인형 AI 경험’을 구현하느냐에서 갈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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