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시장에서 자금 조달 방식이 양극화되면서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전통적인 부티크 벤처캐피털로부터 자금을 받을지, 아니면 자금력이 막강한 대형 플랫폼 투자사로부터 투자를 유치할지의 문제다. 후자 쪽은 큰 판을 만들어내는 데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초기 자금이 오히려 스타트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대형 플랫폼 투자사는 거대한 펀드를 바탕으로 스타트업에 통 큰 투자를 감행하며, 이는 창업자에게는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스타트업계의 베테랑 투자자인 프레드 윌슨(Fred Wilson)의 말처럼, 시드와 시리즈 A 단계에서 조달한 자금 규모와 스타트업의 성공률은 반비례한다는 데이터가 이를 반증한다. 즉, 자금이 적을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2011년 스타트업 지놈(Startup Genome)이 발표한 ‘조기 확장(Premature Scaling)’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초기 단계에서 대규모 자금을 유치한 스타트업은 검증되지 않은 제품 개발과 무분별한 인재 채용에 자금을 투입하며 탄력성을 잃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이윤창출보다는 외형 확대에 집중한 결과로, 스타트업의 핵심인 기민한 전략 수정이 어려워진다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 공동 창업자 폴 그레이엄(Paul Graham)도 같은 맥락에서 초기 스타트업이 과도한 자금을 조달해 과소비를 하면, 오히려 수익성 확보가 늦어지고 조직이 경직돼 경로 수정을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요즘처럼 후속 투자 유치 문턱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대규모 자금 조달 이후에도 방향 수정을 해야 하는 경우, 이미 대부분의 자금을 소진한 상태라 다음 라운드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마저 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투자를 받으면 받을수록 스타트업은 다시 ‘모험’을 강요받게 된다. 벤처캐피털리스트 롭 고(Rob Go)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재위험화(Re-risking)' 과정이다. 스타트업은 투자 라운드가 지날수록 위험을 줄이며 성장해야 하는데, 오히려 대형 자금 조달이 위험 수준을 다시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왜 대형 플랫폼 기반의 벤처 투자사들은 이처럼 위험부담이 큰 전략을 고수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의 목표는 특정 분야에서 ‘1등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망 분야의 수많은 스타트업에 자금을 뿌리고, 일부만 살아남더라도 해당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소수 기업에 투자되어 있기를 바란다. 벤처 투자 세계의 ‘파워 법칙(Power Law)’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승자 독식 구조에서 살아남은 기업이 모두의 손실을 상쇄하는 구조인 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전략은 투자자에게는 통할 수 있어도 창업자에게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어떤 투자자들은 실험의 과정을 함께 견뎌가는 동반자이지만, 또 다른 투자자들은 대형 자금을 태워 ‘로켓 연료’처럼 간접 점화를 한 뒤 폭발 여부를 지켜보는 입장에 가깝다.
결국 창업자는 투자 유치의 양 덩어리보다, 그 자금을 제공하는 투자자의 목적과 동기를 명확히 이해한 뒤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자본은 필수적인 성장 동력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스타트업은 본래의 유연성과 생존 가능성을 상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