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서울에서 김밥 한 줄 평균 가격은 3838원, 자장면은 7654원, 냉면 한 그릇은 1만2615원이다. 칼국수도 이미 1만원을 넘어섰다. 한때 ‘서민 음식’의 대명사였던 메뉴들이 이제는 선뜻 주문하기 부담스러운 가격이 됐다.
그런데 정부 통계에서는 물가가 진정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2.8%로, 6월의 3.2%보다 낮아졌다. 생활물가 상승률도 2.5%였다.
국민이 느끼는 현실과 통계 사이에 간극이 생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물가상승률이 떨어지는 것과 물가가 떨어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3000원짜리 김밥이 3800원이 된 뒤 물가상승률이 2%로 내려왔다고 해서 다시 3000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오르는 속도가 조금 느려질 뿐이다. 정부는 ‘인플레이션 둔화’를 말하지만 국민의 지갑에는 지난 몇 년간 누적된 가격 상승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이른바 ‘20달러 부리토 논쟁’도 결국 같은 문제다. 젊은 층이 생활비 부담을 호소하자 “가격이 과장됐다”, “예전 세대가 더 힘들었다”는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부리토가 15달러냐 20달러냐가 아니다.
왜 한번 오른 생활비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가.
일부 자유지상주의 경제 진영에서는 여기서 급진적인 답을 내놓는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크게 올리고 돈줄을 조여 부실기업과 과도한 부채를 청산하고, 자산 가격까지 떨어뜨리는 ‘계획된 디플레이션’을 한번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제의식은 이해할 만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위기 때마다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었다. 코로나19 때는 전례 없는 재정 지출과 통화 공급이 뒤따랐다.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충격을 막아주면서 위기를 뒤로 미뤘고, 그 과정에서 부채와 자산 가격도 함께 커졌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을 일부러 만드는 것은 위험한 처방이다.
가격과 소득이 내려가도 빚은 그대로 남는다. 빚의 실질 부담은 오히려 커진다. 소비와 투자가 줄고 부동산과 주식이 떨어지면 담보 가치가 내려가 금융기관까지 흔들릴 수 있다.
특히 가계부채가 큰 한국에서 ‘경제를 한번 세게 식혀 다시 시작하자’는 주장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질서 있는 리셋이 아니라 자영업자와 주택 대출자부터 무너지는 연쇄 충격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돈을 풀고 부채로 시간을 사는 것이 답이라는 뜻도 아니다.
여기에 오늘날 통화정책의 딜레마가 있다.
위기가 올 때마다 구제하면 당장의 고통은 줄어든다. 그러나 그 비용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산 가격이 먼저 오르고, 뒤늦게 생활비가 따라 오른다. 이미 집과 주식을 가진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월급에 의존하는 젊은 세대는 더욱 멀어진 자산 가격을 바라보게 된다.
비트코인이 2008년 금융위기 직후 등장한 것도 이런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 비트코인의 핵심은 디플레이션을 일으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나 중앙은행이 필요할 때마다 마음대로 공급을 늘릴 수 없는 통화 규칙을 코드로 만든 것이다.
물론 비트코인이 중앙은행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은 또 다른 극단이다. 금융위기 때 최종대부자 역할을 할 수도 없고 가격 변동성도 크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돈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한국에 필요한 것도 거대한 ‘리셋’이 아니다. 정부는 재정에 규율을 세우고, 중앙은행은 통화가치에 대한 신뢰를 지켜야 한다. 동시에 주택과 에너지, 식품과 서비스의 공급을 늘리고 생산성을 높여 국민의 소득이 생활비보다 빠르게 증가하도록 해야 한다.
좋은 경제정책은 김밥을 다시 2000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4000원짜리 김밥을 부담 없이 살 수 있도록 국민의 구매력을 높이고, 오늘 가진 1만원의 가치가 내일 함부로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남기는 가장 큰 상처는 비싼 가격표가 아니다.
돈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